![]() by Buon 카테고리
최근 등록된 덧글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보..
by 기자 J at 04/29 LG 안치용이 올해 터진 .. by brightbell at 12/11 그 잔혹사에 조인성 추.. by 와초우 at 07/10 제대로 짚으셨네요. 전.. by 비퓨 at 07/07 근데 박재홍선수 SK가서.. by 비퓨 at 07/07 지금 이글을 보니까 참 .. by 비퓨 at 07/07 유동훈 다음으로 믿을만.. by 켈리 at 07/07 요새 반짝이지만 김주형.. by 켈리 at 07/07 안녕하세요 ^^ 저는 .. by 장준영 at 07/01 두산 경기 보셨죠? 이젠 .. by 기아없이는못살아 at 06/21 최근 등록된 트랙백
이전블로그
이글루링크
이글루 파인더
메뉴릿
|
< LG - FA 잔혹사 >
LG 구단의 FA 잔혹사는 아쉬운 선택을 연달아 반복하는 다소 답답한 모습이었습니다. FA 첫해 삼성의 과감한 투자로 해태의 이강철과 LG 김동수를 영입한데 자극받은 LG는 해태 부동의 4번 타자였던 홍현우를 22억에 영입 합니다. 01년 역대 FA 최고액이었던 홍현우의 가치는 당시로서도 22억의 배팅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큰 경기에 유난히 강한 명문구단 해태의 4번타자이면서 당시 나이가 만 29세에 불과 했고, 99년에는 30-30을 달성하기도 했으며, 귀하디 귀하다는 거포 내야수였습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몇몇 구단의 영입 전쟁이 불붙었고 그의 주가는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꺼림직한 부분은 홍현우가 고질적으로 무릎이 좋지 않았다는 점, 계약 직전 해에 역시 무릎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결장했고 결국 2할대 초반을 기록하는데 그쳤다는 점이었죠. 이 같은 점에도 불구하고 홍현우와 LG 구단은 계약서에 사인을 했지만 발표된 22억의 총액 가운데 12억이 계약금이었다는 점은 홍현우의 부진을 어느정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알려진대로 홍현우의 LG 4년간 통산 타율은 2할을 간신히 넘을 정도였습니다. 홍현우의 충격으로 이 후 3년가량 FA 영입에서 손을 뗀 LG는 해태의 후신인 KIA의 진필중을 비슷한 형태로 03년 겨울 영입하게 됩니다. 두산 시절 최강의 스토퍼였던 진필중이 영입되던 시점은 불행히도 고점에서 두산으로부터 KIA에 팔린 후 KIA 구단과 코칭스테프로부터 '속았다'는 한숨을 내쉬던 때였습니다. 그 진필중의 부활을 믿고 홍현우를 능가하는 4년 30억을 저지른 베팅이었는데 불행히도 결과는 진필중의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확신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진필중의 영입이 이상훈의 SK 트레이드의 시발점이 되었던 부분은 단순히 금전적인 손실을 훨씬 뛰어넘어 팬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겨울 팀내 프렌차이즈 스타이자 팀의 간판이던 유지현은 기량 하락을 이유로 극심한 줄다리기 끝에 불과 1년 4억3천에 계약하고 말았습니다. 04년 겨울에는 1년전 유지현의 비극에 이어 94년 신인 3인방의 한 사람이자 고질적인 고관절 부상을 달고도 실로 믿기지 않을 타격 성적을 거두고 FA를 선언한 김재현을 허망하게 SK에게 빼앗기고 말았구요. 06년 겨울. 22억(홍현우), 30억(진필중)에 이은 다음 수순으로 40억 FA 박명환을 영입하게 됩니다. 부실한 선발진에 박명환이 한 해 동안 LG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올해들어 수술을 만류하던 구단의 권유를 뿌리치고 박명환은 결국 팀 전력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박명환은 다이나믹한 투구폼으로 인해 두산 시절부터 부상을 달고 살던 유리몸이었던 점, 그래서 활약이 좋은 해에는 리그 탑 클래스의 구위를 보이지만 거의 격년제(?)로 활약했던 점 등이 고액 FA에 꺼름칙하게 작용했으나 LG는 두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베팅으로 박명환을 영입했습니다. 결국 LG FA 잔혹사에서 그나마 가장 훌륭한 성적을 보여준 선수는 외부영입이 아닌 팀내에서 꾸준하고 성실하게 소리소문 없이 너무도 조용히 김용수의 팀내 최장기간 선수기록을 갈아치운 이종열이었습니다. 사족으로 FA 선수들은 고액 계약으로 많은 부를 챙겼을지 모르나, 이들의 부진은 분명 구단에 좋지않은 선례를 남겨 후배 선수들의 FA 계약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대어급을 제외한 FA 시장은 찬바람이 꽁꽁 부는 것이 현실이죠. < 삼성 - 우승 잔혹사 > 삼성의 우승 잔혹사 역시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84년 저주기 게임의 저주' 라는 제목도 붙었고, 실상 85년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리그 챔피언에 올랐지만 한국시리즈가 없는 싱거운 우승으로 팬들의 인정을 받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8개구단 최고를 자랑하는 구단의 가공할 재정적 지원과 부담을 함께 짊어진채 우승을 위해 몸부림쳤던 삼성 프런트의 노력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삼성을 한국시리즈에서 무릎꿇린 김영덕, 김응룡 같은 적장을 영입하기도 했고, 김태한, 양준혁을 모두 입단 시키기 위해 양준혁을 상무로 보내고, 한국시리즈 준우승 감독을 경질하기도 하는등 감독 경질을 밥먹듯이 했으며, 중앙대 에이스 최창양의 미국진출 후 역수입, FA 제도 첫 해 이강철과 김동수의 영입 등 때로는 상도의를 어겼다는 말도 듣고, KBO 규약을 치밀하게 빗겨 나가는 현란한 스카우트 실력까지. 그렇게 눈물 겨운 노력에도 첫 한국 시리즈 우승은 2002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그간의 피눈물 나는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 OB에게 원년우승을 넘기고 말았던 82년 한국시리즈 패배. - 그렇게 원년 우승을 빼앗아갔던 적장 OB 김영덕 감독을 영입했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야구계의 지우고 싶은 한페이지가 되버린 저주기 게임을 하고도 드라마 같은 우승의 주인공은 롯데가 되고 말았던 84년 한국시리즈. -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고도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를 차지한 해태의 우승, 그리고 이후 해태의 시리즈 4연패의 출발점이 되고 말았던 86년 한국시리즈. - 전기리그 우승, 후기리그 우승, 팀타율 3할의 가공할 전력에도 프로야구 출범 최초로 한국시리즈 0-4 스코어를 기록하며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87년 한국시리즈. - 넘을 수 없는 산으로만 여겼던 해태를 플레이오프에서 제압하고 정녕 우승이 눈에 보일것만 같았지만 창단 첫해 우승이라는 감격을 선물하고 LG에게 무릎을 꿇었던 90년 한국시리즈. - 극심한 투고타저 시즌에도 타격랭킹 1,2,3위와 홈런왕을 보유한채 창과 방패의 대결로 불렸던 93년 한국시리즈 역시 패배. - 2위와 7게임차로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지만 시즌 13게임차로 3위를 차지했던 두산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던 2001년 한국시리즈. 그간 흘렸던 삼성의 피눈물은 2002년 극적인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 후 선동열이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두번의 우승을 더했고 현재까지 전무후무한 11년 연속 포스트시즌 기록을 이어갈 정도의 명실상부한 리그의 강호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